
[제니스뉴스=마수연 기자] “연기는 중독 같아요. 얼른 다시 일상의 평화로움에서 벗어나 큰 갈등이 있는 극으로 들어가고 싶고요. 그게 배우들이 계속 작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지 않을까 생각해요”
선악을 오가며 넓은 연기 폭을 선보이는 배우, 이희준이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으로 변신했다. ‘남산의 부장들’에서 그는 크고 위압적인 몸을 하고, 과격한 말투와 행동을 통해 대통령을 향한 맹목적 충성을 연기한다. 박통(이성민 분)의 경호실장 곽상천으로 분한 이희준의 모습은 이전까지 대중들이 알던 이미지와는 다른 결이라 더욱 눈길을 끈다.
‘남산의 부장들’은 이희준의 또 다른 매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평소 관객들이 아는 이희준과는 외형적으로도, 연기적으로도 180도 변화한 캐릭터를 입고 114분의 시간을 종횡무진 누빈다. 팽팽한 긴장을 유발하기도, 의외의 실소를 선사하기도 하는 이희준의 연기 변신은 ‘남산의 부장들’에서 놓칠 수 없는 재미 중 하나다.
색다른 캐릭터를 입고 스크린을 찾아온 이희준을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로 도전한 새로운 연기와 캐릭터를 향한 깊은 고찰을 진솔하게 담은 인터뷰를 이 자리에서 공개한다.

Q. 곽상천을 연기하기 위해 25kg을 증량했다고 들었어요.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1987’이나 ‘미쓰백’에서 그 사람의 심리적인 가면을 구축하는 데에 노력했다면 ‘남산의 부장들’은 처음으로 재미있는 신체적 가면을 쓰게 된 느낌이었어요. 100kg까지 찌워서 정장을 입고 연기하는데 보통 이희준이 움직이는 대로 잘 안 움직여지더라고요. 일어설 때도 한 번에 못 일어나겠고요. 극장에서 각하 사이에 두고 이병헌 선배를 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한 번에 안 보여서 몸을 계속 제쳤어요. 그런 게 재밌었죠. 대사도 평소에 숨이 차니까 한 마디에 못 뱉더라고요. 한 문장에 다섯 번 숨을 쉬는 거예요. 하하. 병헌 형도 컷 할 때마다 ‘너 숨넘어가겠다. 잠깐 기절했다가 일어나’라고 하셨어요. 저도 재미있고 보는 사람도 재미있는 가면을 쓴 순간이었어요. 걸어가는 모습이요? 허벅지가 안 붙으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하하.
Q. 그만큼 살을 찌웠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재미있어했죠. 하하. 자기 일 아니라고요. 100kg까지 찌우니까 의사 선생님이 당뇨가 올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촬영 전 3개월부터 증량을 시작해서 9개월 동안 촬영을 했으니까 거의 1년을 그 몸으로 보냈어요. 초반 곽상천과 후반 곽상천을 보면 후반에는 정장이 터질 것처럼 맞아요. 계속 몸무게가 올라가서 타이트해지더라고요. 촬영이 끝나고 3개월 동안 살을 빼보자고 했는데 잘 안 되잖아요. 그래서 반강제로 뭔가를 하자고 해서 화보 촬영을 3개월 후로 잡고 나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마지막 보름 정도까지 살이 잘 안 빠졌는데, 그때부터 헬스장 앞에 고시원을 보름 정도 끊어서 하루에 네 번씩 운동하고 닭가슴살과 고구마만 먹으면서 감량했죠. 스무 살 때 처음 연극 하겠다고 대구에서 서울 올라와서 1년 동안 고시원에 들어갔는데 마흔한 살에 자발적으로 고시원에 들어가니까 거기서 감사함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20년 동안 나름 애써서 지금은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는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고시원에서 닭가슴살 먹다가 한 번 울기도 했어요. 하하.
Q. 고생한 만큼 영화에서 이병헌 씨와 한 장면에 있을 때 위압감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정말 다행이었죠. 대본을 보고 곽도원 선배와 이병헌 선배를 상상했을 때, 곽상천은 계속 소리를 질러야 하는 데다가 경호실장이라 체격이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 확 왔어요. 우민호 감독님이 처음에는 ‘절대 살찌우지 말고 희준 씨 연기만 해요. 난 희준 씨 연기가 좋아요’라고 하셨어요. 제가 나중에 살찌워야 할 거 같다고 했더니 ‘찌우면 좋은데 난 감독이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아닌 거 같더라고요’라고 하셨거든요. 최근에 홍보 행사 중 쉬고 있는데 감독님이 ‘사실은 대본 보자마자 희준 씨가 살찌우겠다고 말할 줄 알았다’고 하시더라고요. 하하. 다 계획이 있으셨어요. 곽상천은 우직하고 하나만 믿고 있는 사람이라 체격이 있어야 할 거 같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슬림하고 날카롭게 연기했으면 좀 심심했을 거 같아요.
Q. ‘남산의 부장들’ 이후로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의 폭이 확장됐을 거 같아요.
살찐 모습이 좋아서 다른 감독님이 제안을 주시면 흔쾌히 결정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요. 쉽진 않았거든요. 벌써 살찐 캐릭터 대본이 들어와서 고민 중이에요. 하하. 저도 보면서도 즐겁더라고요. 마지막에 각하를 포함한 네 명이서 밥 먹으러 올라가는데 일렬로 서있는 가운데 저 혼자 이만한 통나무가 있는 거예요. 하하. ‘비주얼적으로 재미있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어느새 13년 동안 배우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 시간을 돌아보면 감회가 남다를 거 같아요.
정말 감사하죠. 처음에 연기하겠다고 대구에서 30만 원을 들고 올라와서 15만 원짜리 고시원에 들어갔어요. 남은 15만 원으로 한 달을 생활하면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겠다고 생각하니까 하루에 5천 원을 쓸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라면 하나를 사서 아침과 저녁을 해결했죠. 이후에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본격적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찰나가 고시원에서 닭가슴살을 먹으면서 생각나는 거예요. 돌아보니까 고마운 사람밖에 없었어요. ‘이 선배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선배의 영향을 받아 한예종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분들 덕에 제가 이 자리에서 닭가슴살을 먹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울었던 거 같아요. 하하.
Q. 설 연휴 개봉작들과 흥행 경쟁을 하게 됐어요. 그중 ‘남산의 부장들’만의 강점이 있다면요?
여러 세대가 보고 대화를 나누기에 정말 좋은 거 같아요. 서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지만요.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좋은 영화의 기능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요즘 특히 세대 간의 대화가 더 없어졌잖아요. 그래서 좋을 거 같아요. 제 스태프 중에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20대 친구가 있는데, 영화 어떻게 봤는지 물어보니까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모르고 마지막 장면에 대해 들은 것만 있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긴장되고 손이 저린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보시는 분들도 부마항쟁 같은 소재들을 잘 몰라서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영화 속 네 인물의 심리는 충분히 따라갈 수 있고요.
처음 제가 대본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이런 캐릭터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다 끝내고 나니까 일상에서 무언가 100%, 120% 믿고 있는 신념이 아주 강한 사람을 볼 때 제 시선이 조금 달라졌어요. 이게 배우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남산의 부장들’을 하지 않았다면 인간 이희준은 일상에서 그런 캐릭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작품을 참여하고 나니까 ‘이런 일을 겪고 자라면 저렇게 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게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고요.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일상에서 절대 굽힐 수 없는 120% 신념을 지닌 사람을 만났을 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예전에는 말도 아예 섞지 않았다면요. 제 바람이지만 관객들이 곽상천을 봤을 때 ‘저 사람도 뭔갈 믿고 있던 것뿐이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런 캐릭터도 이해는 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역할을 한 배우로서 가장 큰 소득일 거 같아요.
Q. 그렇다면 ‘남산의 부장들’이 가진 미덕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역사적 사실이 있긴 하지만 새로운 상상으로 장면을 삽입하지 않고 40일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신문으로만 봤던 사실에 카메라를 들이밀어서 확대한 느낌이랄까요. 그렇다고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마지막에 관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 같기도 해요. 감독님이 편협할 수도 있는 현재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선을 선택하신 거 같아요. 아주 예민하고 섬세하게 줄타기를 해요. 편하게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고 연출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아주 신중하고, 예리한 줄타기를 하시면서 그리신 거 같아요. 그래서 정말 힘들었을 거로 생각했어요.
Q. 우민호 감독님의 전작 ‘마약왕’을 함께한 만큼 이번 작품의 흥행도 신경 쓰일 거 같아요.
흥행보다는 감독님이 가장 많이 신경 쓰였죠. 언론시사회가 끝나고 다 같이 식사하는데 누가 ‘우민호가 돌아왔다’는 기사가 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이 ‘제가 어디 갔었냐’고 하셨어요. 하하. 저희야 우스갯소리로 하지만 감독의 일이라는 게 사활이 걸린 거잖아요. 항상 마지막 기회일 수 있고요. 배우도 그렇지만 감독은 더 심한 거 같아요. 감독님이 마음고생 많으셨을 거예요. 그런데도 그 연출력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 상황에서도 심정적으로 흔들리지 않으면서 어떤 식으로 차갑게 연출할지 집중하셨다는 게 대단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벼랑 끝의 상황이잖아요. 하하.
Q. ‘남산의 부장들’의 흥행을 예측한다면요?
제가 동료 배우들의 영화를 보고 물어보면 스코어가 얼마인지 맞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전 그런 감이 전혀 없거든요. 하하. 대본 고르는 것도 주변에서 ‘넌 대본 고르는 기준을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갑자기 ‘최악의 하루’ 했다가 ‘남산의 부장들’ 하면서 살찌우고요. 하하.
Q. 그렇다면 이희준 씨만의 작품 선택 기준이 있나요?
대본을 본 순간 ‘재밌겠다’ 하면서 심장이 뛰고 흥분되는 걸 찾는 거 같아요. 중독이죠. 더 재미있고 흥분된 무언가를 찾는 거예요. 기준은 오로지 그거 같아요. ‘최악의 하루’ 때도 회사에서 다 반대했거든요. ‘오빠 생각’과 ‘로봇 소리’를 같이 하고 있어서 시간도 안 났어요. 근데 사흘만 찍으면 된다고 해서 스케줄표를 두고 조정해서 사흘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감독님께 전화해서 ‘최악의 하루’를 하겠다고 해서 찍은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더 재미있었어요. 예리와 연기할 때도 컷 소리 나면 웃으면서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대본을 볼 때 그런 재미가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제 기준이 맞는 거 같아요. 제가 관객 수도 못 맞추지만 제가 재밌으면서 연기하면서 신나야 보는 사람도 신나는 거 같아요.